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쿠마 시게노부 (문단 편집) === 총리 시절 === || [[파일:external/www.weblio.jp/souri08.jpg]] || || 8대 총리 취임 후. || 1898년 6월, [[이토 히로부미]]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으나 [[오자키 유키오]] 당시 문부대신의 '공화연설'과 후임 총리가 되는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의 적절한 방해[*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의 이 연설은 일본에서의 공화제 실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금권정치 비판이었다. 그러나 이걸 들은 야마가타파는 그를 공화주의자로 매도했고, 결국 오자키는 문부대신직을 내려놓았다.]로 반년도 못 채우고 물러나야 했다. 그러다가 [[다이쇼 덴노]]가 즉위하고 민중운동이 폭발한 이후 1914년, 지멘스 사건으로 퇴임한 [[야마모토 곤노효에]]의 후임으로 다시 총리 자리를 꿰찬다. 거물들이 넷이나 한꺼번에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차기 총리직은 정권 교체의 주역인 공화파들의 인망을 얻고 있으면서도, 이렇다 할 업적은 없었으나 어쨌든 경험도 있고 해외에도 명성이 있으며 원로들과도 적당히 친한 오쿠마 시게노부에게로 돌아가게 된다. 취임 석달 후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터진다. 오쿠마는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[[독일]]에게 선전포고를 내렸다.[* 이때 오쿠마는 국내 정책의 실패로 위기에 놓여있었지만 전쟁으로 국내의 불만을 누를 수 있었다. 오죽하면 "오쿠마를 살린건 '카이저'다."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.] 독일이 본토의 전쟁에 전력을 쏟고 있을 동안 빈 집이 된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에 일본군을 보내 독일 주둔군과 함대를 격멸하고 독일의 중국과 태평양 지역 이권을 손아귀에 넣는다. 전승에 힘입어 [[의회해산]]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쿠마 시게노부는 권력의 정점에 서는 듯 했다.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. 오쿠마 정권은 [[위안스카이]]에게 그 유명한 [[21개조 요구]]를 내밀고 이것은 결정적인 실책이 된다. 21개조 요구의 내용이 민중에 유출되면서 중국인들이 폭발, 거대한 [[반일]] 조류를 발생시키고 만다. 하지만 구미열강 대다수가 세계대전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열강은 5호 요구를 제외한 21개조 요구를 승인하였고 미국 조차도 이시이-랜싱 협정을 체결하여 만몽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하는 등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. 하지만 오쿠마 내각이 이를 얻기 위해 분명히 우호국인 중국을 상대로 최후통첩을 운운하면서 막무가내로 군 것에 대해 [[이시바시 단잔]][* 이 당시에는 한창 혈기왕성할 스물아홉 청년이었다. 총리로 영전한 시기가 무려 [[제2차 세계대전]] 종전 후고, 본인이 제55대, 제2차 오쿠마 내각이 제17대였으니 정말 오래 전임을 알 수 있다. 한 가지 덧붙여 이시바시는 오쿠마가 설립한 [[와세다대학]] 철학과 졸업생이었다.], [[하라 다카시]]를 비롯한 정치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조차도 무식한 방법으로 반일감정만 부추겼다고 오쿠마와 [[가토 다카아키]] 외무대신을 혹독하게 깠다. 결국 이 21개조 요구는 오쿠마와 가토가 내각과 외교에 대한 문민통제, 정당지배를 강화하고 있다고 불만을 품고 있던 야마가타의 역린을 건드려 오쿠마 내각이 총선에서 압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의 주도로 2차 오쿠마 내각은 선거 중 뇌물 사건을 빌미로 가토 외무대신이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총사퇴하고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 총독이 총리에 입각하여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